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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학

극장의 변천사 1

극장의 변천사 1

 

1) 서양

우리는 "드디어 막이 올랐다."라는 것으로 시작하는 비평을 자주 접하게 된다. 그런데 실제로 공연의 시작을 알리기 위해 막을 올리는 공연은 그리 많지 않다. 프로시니엄 무대, 돌출무대, 원형무대 가운데 프로시니엄 무대에만 막이 있다. 그리고 막의 상부도 작품의 디자인이나 무대화를 위한 요구 사향에 따라 달라진다. 그런데도 이 모든 형태는 공통적인 기원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이 바로 고대 그리스의 극장이다.

 

① 고대 그리스 고대 극장

고대 그리스나 로마 시대의 극장에 대해 알려진 바는 주로 고고학적 연구와 추측에 기반하고 있다. 그리스 극장은 이러이러하였다더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거의 없다. 남아 있는 유물을 종합했을 때 정해진 하나의 양식이나 유형은 없었다. 다만 오늘날 알려진 대로 당시의 극장들에서 여러 가지 요소들이 공통으로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경사면에서 만들어진 좌석은 관객을 위한 것으로 객석 또는 보는 장소라고 불렀다. 이 객석은 원형의 연기 구역인 오케스트라를 삼면에서 둘러싸고 있었다. 이 오케스트라 바로 뒤에 '스케네', 즉 무대 건물이 있었다. '스케네' 앞 벽에는 문이 몇 개 있었는데 여기를 통해서 배우가 관개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내부에 방이 여러 개 있는 점으로 미루어 무대 기계를 보관하거나 소품을 두거나 혹은 분장실로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스케네'와 평행을 이루며 양편으로 뻗은 높고 긴 벽이 있었는데 이를 '파라스케니아'라고 불렀다. 약 30 cm 높이의 낮은 덧마루가 '파라스케니아' 앞에 뻗어 있었을 것으로 본다. 후기 그리스 극장에서는 '파라스케니아'가 '스케네'에서 바로 뻗어 있지 않고 관객에게 더 가까이 위치하였다. 이러한 위치의 변화로 덧마루가 '스케네' 앞을 가로질러 뻗어 가면서 자연스럽게 단상 (높임) 무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기둥 사이를 가로지르는 아치, 즉 '프로 스케니엄'은 이 단상 무대의 뒤편, '스케네' 바로 앞에 있었다. '프로스케니엄'은 '스케네'의 2층에서 입구 같은 돌출부 역할을 했다.

 

② 고대 로마 시대의 극장

로마의 건축가들은 그리스의 건축물들을 어설프게 변형시키려 했지만 결국 로마 시대의 국장은 그리스 시대 극장의 단순한 변형에 지나치지 않았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전통적인 그리스 극장의 3가지 분리 영역인 오케스트라, 객석, 스케네 이 하나의 영역으로 통합되었다는 것이다. 이 구성 요소의 통합은 로마 시대 극작 구조에 몇 가지 흥미로운 발전을 이야기했다. 객석(흔히 키 베아라 명칭 되었다)은 반원형으로 제한되었다. 당신의 여러 극장에서 카베아는 낮은 벽으로 오케스트라와 분리되었다. 오케스트라는 무대 구역으로부터 돌출되어 나온 반원형으로 고정되었다. 무대 구역은 프로시니엄의 틀을 갖췄다. 스케네는 '스케네 프론스'라고 하는 정교하게 장식된 하나의 건물로 변형되었다. 그 높이는 '카페아'와 비슷했다.

 

통합된 로마 시대 극장 구조의 발전으로 인해 다른 여러 미세한 변화가 일어났다. 극장들은 그리스인들이 선호했던 언덕의 경사면 대신 평지에 건축되었다. 더욱이 다수의 극장에 지붕이 있었다. 지붕은 '스케네 프론스'에서 프로시니엄 가장자리까지 뻗어 있었다. 어떤 극장들에서는 벨 룸이라고 하는 차일이 객석 전체를 덮기도 했다.

 

364년 로마 제국 멸망과 더불어 서커스, 칼싸움, 사자에게 먹이 주기 등을 주로 했던 대규모 극장들도 버려져 사라진 시대의 유물로 남게 되었다. 로마 제국 멸망 후 대략 500년 동안 공식적인 연극은 사실상 없어졌다. 그러나 연극적 전통은 주로 배우와 묘기 꾼으로 구성된 유랑극단에 의해 그 명맥을 유지했다. 그들은 관객이 형성되는 곳이면 뜰이나 말을 광장, 간이무대 등 어디서라도 비밀리에 공연을 벌였다.

 

③ 중세 시대의 극장

중세 시대 교회는 세속적인 연극에 대해 반대하였기 때문에 연극적 활동을 금지했다. 그런데 바로 그 교회에 의해 연극이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10세기경 성직자들이 신도들에게 성교의 교훈과 기독교의 교리를 전파할 목적으로 성경의 장면들을 극화하기 시작했다. 13세기에는 이런 종류의 막간극이 지나치게 복잡해져서 교회 내부에서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 교회 밖으로 나오게 되었고, 무대화 기술은 교회마다 지역마다 달라졌다. 단상 무대가 주로 교회에 인접하여 세워졌고 관객들은 마을 관장에 서서 보았다. 어떤 경우에는 무대가 마차에 실리기도 하였는데, 이를 마차 무대라 하였다. 마차 무대는 마을에서 마을로 이동하며 공연을 벌였다.

 

이러한 공연 양상들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세부적으로는 달랐지만, 장치에 대한 개념이 동일했고, 교회 안에서 공연을 할 때는 성직들이 발전시킨 관습을 따랐다. 무대 장치는 맨션 또는 구역이라고 불린 작은 건물들로 구성되었는데, 이를 통해 공연에서 보여주려고 하는 성서의 내용에 적합한 지역을 묘사했다.

 

지옥과 천국의 맨션은 무대 양편에 배치되었고, 그 사이에 다른 맨션들이 있었다. 또한 맨션 앞으로 '플라테아'라고 하는 불특정한 연기 공간이 있었다. 대부분의 행위가 여기서 벌어졌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중세 연극의 부산물 가운데 하나는 바로 비교적 사실적인 특수효과의 발전이다. '시크리츠'라 불린 무대 기기 장비에는 바닥 문, 무대 주위로 사람과 사물을 이동시키는 다양한 달기 장치가 있었다. 1501년경 중세 어느 도시에서 행해졌다는 공연 기록에 따르면 기술자가 고용되어 '시크리츠'를 설치하였고, 지옥의 장비들을 조작하는 데만 18명의 인력이 투입되었다고 한다. 또한 무대의 배경 장치 작화에 5명 정도가 참여했고, 4명의 '프롬프어'가 연기를 도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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