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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학

극장의 변천사 4

극장의 변천사 4

 

2) 우리나라의 극장 건축

개화기 이전까지만 해도 건축된 극장이 없어서 연극이나 무용, 음악 공연은 탁 트인 야외무대에서 행해졌다. 그 결과 연극과 같은 공연예술 장르는 양식화되지 못했다. 물론 연극의 경우 양식화되지 못한 대신 자유분방하게 굳어짐으로써 한국미의 특징이라 할 자연미만은 간직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다른 측면에서 보면 우리 전통극은 세련된 무대예술이기보다는 민속 예능에 가깝게 굳어진 감도 없지 않다. 바로 그 점에서 극장이 중요하게 부각된다고 하겠다. 주지하다시피 극장은 무대예술의 생산 기지로서 창조자와 수용자의 커뮤니케이션 장소이며, 예술인을 키워내고 또 연극을 관람하는 훈련을 시키는 교육장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개화기 전까지는 건축된 극장이 없었기 때문에 극장의 기능을 궁정 뜰이나 마당이 도맡아 했다. 그런 장소가 예술 공간으로서 기능을 다 할 수 있었겠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 않다고 하겠다.

 

따라서 개화의 물결 속에서 건축된 극장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협률사라는 최초의 관립 극장이 생겨났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개화기는 국운의 쇠퇴와 맞물렸고, 특히 1910년 일제의 침략으로 극장 문화가 꽃피기 어려웠다. 정치적 배려와 경제적으로 뒷받침해야 하는 극장은 발전하기 어려운 악조건에 가로놓여 있었다. 식민지 시대에 동양극장 등 한두 개의 건축된 극장이 생겨났으나 자본주가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극장들이 제 기능을 하기가 어려웠다.

 

1945년 해방 후 러시아와 미국의 신탁통치, 남한 단독 정부 수림 등 과도기의 혼란 속에서 문화 예술에 대한 의지도 더욱 커지게 되었다. 여러 차례 국립극장 설립을 청하는 호소문이 이어졌고 이에 대한 법률도 마련되었다. 그 결과 1950년 부민관을 수리, 개조하여 국립극장으로 삼게 되었고 유치진이 초대 극장 장을 맡았다. 그러나 개관식을 갖고 얼마 되지 않아 6·25전쟁이 발발해 미약하게나마 피어오르기 시작한 우리 예술 문화의 결실이 사그라들게 되었다.

 

하지만 대구의 국립극장이 마련되고 2대 극장으로 서항석이 선출되어 피난 중에도 공연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다. 6·25 동란이 끝나고도 대구에 머물던 국립극장은 1957년 환도하여 명동에 자리하고 있던 시공관으로 옮겨진 후 1973년 장충동에 지금의 국립극장이 세워질 때까지 전속 국립극단을 탄생시키면서 우리나라의 공연문화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1930년 착수하여 1962년 개관한 드라마센터는 우리 극단에 당시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었다. 470석 규모로 주 무대와 양옆 측면무대를 가진 돌출무대 양식의 이 극장은 최신 음향 설비와 조명 시설로 토월회와 극예술연구회의 연구극 전통을 잇는 실험극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이후 세종문화회관, 예술의전당 등 세계적 수준의 복합 극장이 등장했고 최근에는 동숭아트센터, LG아트센터, 한전아트센터 등 전문 공연장에서 수준 높은 공연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다.

 

3) 우리나라의 소극장

소극장은 400석 이하의 객석을 가진 극장이라고도 하고 300석 이하의 극장이라고도 한다. 소극장의 효시인 앙드레 앙투안의 자유극장이 350석이었다고 하니 소극장의 객석 규모를 규정하는 데는 그 정도 숫자가 타당한듯싶다. 소극장이라는 단어는 극장의 규모가 주는 외형적인 것보다는 그 극장 안에서 이루어지는 연극 행위의 내용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것을 요약하면 실험성, 창조성, 혁신성을 통한 반기 성 운동이라 정리할 수 있다.

 

사람들이 소극장을 보는 눈에는 두 가지 긍정적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지성미와 친근감이 그것이다. 보잘것없는 궁벽한 장소에서 예술이 창조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세종문화회관이나 국립극장 같은 으리으리한 극장에서는 왠지 언행이 자유롭지 못하지만, 사무실 정도의 규모인 소극장에서는 편안한 심리 상태가 된다.

 

우리나라 소극장의 효시는 1958년 을지로 입구에 문화 공보국 (오늘날의 문화관광부)가 마련한 원각사다. 1년 만에 화재로 없어지고 만 원각사는 나중에 국립극장(명동)을 마련하는데 계기가 되었다.

 

원각사는 존속 기간이 짧고 대관에 의존한 극장 운영이였기 때문에 최초의 소극장이라고는 하지만 연극인들에게 소극장으로서의 강렬한 이미지는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최초의 소극장 하면 대부분 카페 테아트르를 꼽게 된다.

 

카페 테아트르의 등장은 우리나라 연극사에서, 특히 소극장을 거론할 때는 두고두고 기억될 이름이다. 파리 유학에서 돌아와 극단 '자유'를 창단했던 이병복과 김정옥이 파리식 찻집 극장을 구상하여 1969년 4월 9일 세계 연극의 날을 기해 문을 연 것이 카페 테아트르의 출발이다. '차와 연극'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던 이 극장은 당시로서는 기발한 아이디어라 할 만한 찻집 극장에는 점과 프랑스 전위 작가의 부조리 연극, 그리고 유럽풍의 우아한 실내로 장안의 화제를 모았다. 카페 테아트르는 법률적으로도 화제를 모았다. 식품 영업 허가를 받은 장소에서 공연을 한다 하여 개관 두 달 만에 영업 정지 처분을 받았다. 결국 연극인들의 진정에 힘입어 영업 정지는 풀렸지만, 합법적 공연장 허가는 폐관 때까지 얻어내지 못해 그 문제는 1975년 폐관할 때까지 악몽처럼 따라다녔다. 또한 카페 테아트르는 소위 살롱 드라마라는 말을 유행시키면서 유사한 다방 식 소극장을 파생시키기도 하였다.

 

1969년 카페 테아트르가 생기고 나서 한 달 후 에저또 소극장이 생겨 팬터마임과 가두 극의 산실 역할을 했다. 여기서의 모든 공연은 실험성을 띤 작품들로만 이어졌다. 윤대성, 윤조병, 김용락의 희곡이 자주 공연되었고, 유진규가 팬터마임 배우로 자리를 굳히기도 했다.

 

1974년 개관한 민예 소극장은 특별히 센세이션을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공연작을 살펴보면 창작극 위주로 그들이 내세우는 전통과 현대와 조화라는 일관성을 띠었다.

 

이 밖에도 삼일로 창고극장, 극단 실험 극장, 전용 극장, 공간 사랑, 엘칸토 예술 극장, 국립극장 소극장(현재 달오름 극장), 문예회관 소극장, 마당세실 극장 등이 소극장 문화를 꽃피우는데 일조했다.

 

근래 소극장이 늘어난 것은 1981년의 공연법 개정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전의 공연법은 주로 건물의 용도와 주거 지역인지 아닌지의 여부 그리고 복도의 폭, 의자와 의자 사이의 거리, 변기의 규정 수량 들을 따져 허가하는 형식이었다. 이 규제가 완화되면서 소극장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소극장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이점을 극단에 제공한다.

 

① 공연 및 연습 공간 확보

② 창작 실험장 제공

③ 단원의 사기 진작 및 극단 이미지 부각

④ 장기 공연으로 인한 연기력 향상

⑤ 장기 공연으로 인한 흥행 성공의 가능성

⑥ 단원 및 예비 단원의 교육 및 훈련장 제공

 

그러나 소극장은 또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

 

① 경제적 부담 (극단 전용 극장이 경우)

② 좁은 공간에서의 표현의 제약

③ 레퍼토리의 한계

④ 밀실 주의 (연극의 왜소화)

⑤ 경제적 부담으로 인한 흥행성 치중

 

사실 소극장이 실험장 구실을 하기 위해서는 소극장에서 만든 작품이 대극장으로 나가거나 작가와 연기자, 연출 및 디자이너와의 공동 작업을 통해 새로운 표현 양식이 관객에게 확인되어야 하는데, 우리의 현실상 소극장과 대극장의 연결은 이루어지기가 어렵다. 대극장 공연을 마음 놓고 가질 수도 없거니와 지금까지 보다 넓은 공연장의 공연물을 소극장 공연으로 축소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소극장은 작품 중심으로 성격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소극장에 대한 지원은 물질적인 차원보다 정신적인 차원에서 더 중요하다. 실험 및 훈련을 위해서 소극장의 공연에는 레퍼토리 선택의 제한이 없어야 한다. 양식적인 실험을 거치지 않고서는 좋은 공연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작품의 내용이 문제가 되어 공연을 못 하게 될 때 소극장이 입는 타격은 대단하다.

 

소극장을 가짐으로써 활발한 실험을 통해 좋은 작품을 만들고 훈련과 교육을 통해 탁월한 연극인을 길러낼 수 있는 여유는 소극장을 유지하기 위한 경제력 어려움 때문에 사라진 셈이다. 그러나 소극장을 가진 극단은 교육과 훈련을 통해 인재를 길러내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현재 각 소극장에서 벌어지는 워크숍은 거의 공연 중심이다. 연극 전반에 관한 간단한 이론의 개발과 연극 연습을 통해 워크숍을 하지만 연기 훈련이나 '드라마 투루기', 연출, 디자인 등에 대해서도 체계적인 훈련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소극장의 생명은 실험성에 있다. 여러 가지 이유로 현재 소극장이 흥행 공연장의 성격에 머물 수밖에 없는 사정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각 소극장은 자체의 실험적 성격을 구체화할 수 있는 공연과 병행해야 한다. 소극장의 사활과 극단의 철학 및 이념에 결정적인 작용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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